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 했는데 1980년부터 현재까지는 급변하는 전환의 시대로서 강산정도가 아닌 세계가 변했다. 국제적으로도 큰 변화가 있었다. 개혁과 개방을 표방한 고르바초프의 등장으로 베를린의 장벽이 무너지고 2차대전 이후 분단되었던 동서독이 통일이 되었다. 헝가리, 루마니아, 폴랜드 곳곳에서 공산정권이 무너지고 민주화의 강물이 흐르기 시작 했다.

  드디어 소련에서도 공산당은 불법화 되었고 레닌의 동상도 철거되었다. 강경보수파들이 시도했던 쿠데타가 3일천하로 끝나면서 소련의 개혁은 가속화되어 공화국들이 일제히 독립을 선언했고 생각지도 못했던 소련연방이 해체되고 공화국 공동체가 등장했다.

  우리나라는  제 6공화국 들어서 북방정책에 힘을 써서 고르바초프가 제주도에 들러 한소 정상회담도 이뤄졌고 정상적인 국교가 수립되었다. 1983년 9월 7일 우리노회가 개회중에 칼(KAL)기 사건 소식을 듣고 희생자들과 유족들을 위해서 기도하던 때를 생각하면 시편 126편의 말씀같이 꿈꾸는 듯한 일이다.

  중국과도 상당한 교역이 이뤄지고 중국교민들의 모국방문도 자연스럽게 계속되고 있다. 중국과의 정상수교도 머잖아 이뤄질 전망이다.

  뿐만이 아니다. 드디어 남북당사자간에 공동선언문이 채택되고 남북직교역도 성사될 전망이어서 녹슬은 경의선에 철마가 달릴 꿈이 새해의 소망이 되어가고 있다.

  국민의 욕구가 다 충족된 것은 아니지만 국내적으로도 어두운 밤이었던 5공화국시대가 지나고 국민의 직선에 의한 대통령이 통치하는 제 6공화국이 되었다. 1988년에는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서울에서 올림픽도 성공적으로 치루었다. 그리고 지방자치 시대도 열리어서 지방의회가 설립된 가운데 지방자치단체장들의 선거를 앞두고 있다. 이런 때에 교회도 면화의 시기를 맞이했으니 1984년에는 한국교회선교 100주년이 되었고 1991년에 우리 노회는 창립 70주년을 맞이한 것이다.

  비공식적으로는 오래전부터 복음의 전파가 있었고 복음서가 한글로 번역되어 한국교인들의 손에 들려졌고 이미 소래·의주에는 교회도 세워졌다. 그러나 공식적으로는 미국영사관의 공의로 한국선교를 목적하고 들어온 알렌의사의 1884년 입국을 기점으로 하여 한국교회는 1984년에 선교 100주년을 기념하게 된 것이다.

  선교 100주년을 맞이한 우리 교단은 두가지 목표를 세웠으니 첫째는 오천교회 백오십만 성도를 이룩하자는 전도운동이었고 둘째는 100주년 기념관 건립이었다. 오천교회운동은 선교 100주년을 10년 앞둔 1974년 제 59회 총회에서 총대전원이 일어나서 서원결의한 것이다. 이 계획에 의해서 우리노회에 할당된 개척교회 수는 78개처였는데 1981년까지 38개처, 1984년까지 38개처씩 분할개척하라는 것이었는데 이는 너무나 비현실적인 계획이었다.

  당시 우리노회의 교회는 280여개처였으나 안동 영주 2개시와 봉화, 의성, 예천, 청송, 영양, 영풍읍에 위치한 소수의 교회들을 제외하면 거의가 농촌에 있어 경제적 기반이 약했고 미자립 교회가 태반이 넘는 실정이었다. 때문에 우리 노회로서는 미자립교회들의 현상유지도 힘겨운 상태여서 개척교회운동은 지지부진을 면치 못했다.

 그러나 100주년기념관 건축분담금은 총45,321,730원을 1985년 7월 15일 까지 완납했다.

  도산서원과 하회 민석마을이 있어서 고대의 전통이 살아서 숨쉬는 안동을 사람들은 안 동하는 곳이라고 한다. 그만큼 영남의 북부지대는 국가적으로도 미개척지로 남아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진정 그렇기만 할까? 경안노회설립 70주년을 맞이한 현재 안동시내에 교파를 초월한 교회수가 40여 처에 달한다. 이사실은 산업화, 도시화의 변화는 미미하나 유가의 고향 안동이 복음화 되어가는 변화는 소리없이 그러나 확실하게 일어나고 있음이 너무나 분명한것이다.